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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가작)] 선의 취향- 이승민

  • 기사입력 : 2016-01-04 09: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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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오가 선의 곁을 떠난 지 오늘로 100일째다. 누군가와 헤어진 지 100일째 되는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선은 오늘도 일어나야 하는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눈을 떴다. 명암 차이가 거의 없는 창문의 안과 밖. 안팎으로 조밀한 어둠만 가득한 지금은 한참을 쳐다봐도 벽과 창틀의 경계가 모호하여 어디까지 창문이고 어디부터 벽인지 아른거렸다. 미오와 헤어진 후 좀처럼 쓰지 않는 어두운 색 벽지를 사와 도배를 새로 한 탓이 크다. 하루 종일 밥도 거른 채 도배를 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비집고 들어오질 않으니 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창문을 볼 때마다 창틀과 벽의 경계를 뭉갠 어정쩡한 벽지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그루잠을 더 자고 싶은 동물적 욕구가 하품으로 발현되려고 했지만 선은 입 근육에 단단히 힘을 주고는 나오려는 하품을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처럼 새벽에 눈을 뜨면 다시 잠드는 것은 포기해야 했고 원치도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온 선은 낡은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탁상용 거울을 집어 얼굴을 들여다봤다. 왼쪽 눈가 아래에 하나, 오른쪽 광대뼈 아래에 하나, 그리고 일주일 전부터 새로 옅게 올라오기 시작한 오른쪽 귀밑머리 옆에 하나. 잡티가 총 세 개가 됐다. 생김새가 꼭 노인들 얼굴이나 팔등에 돋는 거무스름한 검버섯 같다. 뾰루지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다. 기미나 잡티는 여자한테나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던 선은 처음 피부에 나타난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을 때 얼굴에 검은 칠이 묻은 줄 알고 화장실에서 박박 문질러 씻었다. 하지만 옅어지기는커녕 오래지 않아 깊게 새긴 문신처럼 단단히 얼굴 위에 자리 잡았다.

     "잡티가 올라오네? 비비크림이라도 사서 발라봐."

     사실 얼굴에서 처음 잡티를 발견한 건 사무실의 유일한 홍일점인 김 팀장이었다. 미오가 떠난 지 보름쯤 됐을 때였다. 퇴근 무렵 고객과 마지막 상담 통화 중이던 선의 자리를 지나면서 그녀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를 듣고 그는 화장실로 가 얼굴을 확인했다. 김 팀장 말대로 전날까지는 보지 못했던 반점 같은 것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미오와 헤어지고 나서 거울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안 그래도 엉망인 몰골인데 보기 싫은 잡티가 흰여울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벌레처럼 묻어 있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문지르고 씻어 봐도 전혀 변화는 없었다. 선은 그날로 화장품 가게에 들러 비비크림을 샀고 점원과의 상담을 통해 '숨은 멜라닌 색소까지 찾아 효과적으로 케어해준다'는 남성용 미백 화장품을 보름치 생필품 구입비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했다.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샤워를 하고 스킨과 로션, 미백 에센스를 꼼꼼히 바른 다음 비비크림을 얼굴 전체에 펴 발랐다. 그새 색이 더 거멓게 올라왔는지 살색 비비크림 아래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잿빛 음영과 윤곽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느낌이었다. 선은 검지 끝에 비비크림을 콩알 반쪽만큼 더 짜내 잡티 부위에 집중적으로 덧발랐다. 피부색만 허옇게 될 뿐 역시 완벽하게 가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울을 보니 가부키 화장을 한 듯 얼굴만 동동 떠 있었다. 선은 시간 때문에 그쯤에서 그만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화장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마주친 앞자리 동료 A가 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먼저 출근해 있던 직원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일제히 선을 쳐다봤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것 같았는데, 비비크림 양이 다소 많긴 했던 모양이다. 좀 더 세밀한 양 조절과 자연스럽게 펴 바르는 기술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미오가 있었다면, 손재주 뛰어난 미오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어설프진 않았을 텐데. 이래서 남자에겐 여자가 필요하다.

     "단지 비비크림 약간 발랐을 뿐입니다."
     선은 통로를 지나가다 말고 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 A의 귓불을 잡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A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반응이 없는 A가 수긍을 한 것인지 뜨악하게 받아들인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자 선은 약 10초 정도 미동 없이 시선을 유지했다. 그제야 A는 마지못한 얼굴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선은 그의 귓불에서 손을 떼고 자리로 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이어마이크를 썼다. 고개를 들어봤지만 A의 모습은 칸막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직 업무 시간이 시작되려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등 뒤로 김 팀장이 박수를 두 번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업무 준비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 팀장을 바라보고 섰다. 선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일어나서는 또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이상한 시선으로 볼까 싶어 고개를 45도 정도 숙였다.

     "너희들 자기 관리에도 신경 좀 쓰면서 살면 안 되겠니? 내근 상담직이라고 매일 그렇게 수컷 냄새 풀풀 풍기면서 꾀죄죄하게 하고 다녀야겠어? 아무리 전화 받는 게 일이라지만 좀 깔끔하고 나이스하게 하고 다니란 말이야."
     맥쩍은 표정으로 업무와 관련된 지시 시항 몇 가지를 더 전달한 김 팀장은 다시 박수를 두 번 치는 것으로 본격적인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렸다. 요즘 들어 남자 직원들을 향한 외모 지적이 부쩍 늘었다. 처음 간간이 타박이 이어질 때는 '오늘 그날인가 봐'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며 남자인 우리가 이해하자는 분위기였지만 그날이 매일이 된 지금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 팀장이 칸막이 안으로 사라지자 상담사들은 다시 이어마이크를 끼고 업무 준비에 들어갔다. 아홉 시 정각이 되자 선도 라인을 열고 첫 상담 전화를 받았다.?

     "희망상조입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가 내 구좌로도 상조 가입이 되나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목소리였다.
     "그럼요. 고객님.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남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흔넷이라오."
     선은 너무 성급하게 '그럼요' 라고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짧은 3년 만기 상품으로 한다고 해도 조금 위험할 수 있는 나이였다.
     "고객님, 혹시 보호자나 자제 분은 없으신가요?"
     다시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침 출근 때 날이 좀 꾸물거리는 것 같았는데 창밖으로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제법 세차게 쏟아지는 통에 수선스러운 빗소리가 통화 목소리를 짓이기며 귓속으로 섞여 들어왔다.

     "고객님, 고객님?"
     열려 있는 창틈으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찬바람이 들어와서 그런지 선은 코가 간질거렸다. 재채기가 나오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으며 몇 번 더 고객님을 불렀다. 전화기 저편은 묵묵부답이었다. 누군가 깃털로 콧속을 살살 간질이는 기분이 들더니 기어이 거센 재채기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선은 두 번째 재채기를 하면서 몸의 반동으로 인해 손가락으로 라인 스위치를 건드렸다. 뚝. 전화가 끊겼다. 선은 먹이를 뺏긴 강아지처럼 신규 구좌 등록 화면이 떠 있는 모니터만 멍하니 응시했다. 재채기 때문에 실수로 전화가 끊겼다는 사실을 고객은 전혀 모를 텐데.

     어차피 일흔네 살이나 먹은 고객은 보호자 없이 자신 명의로 가입이 불가능하다. 보험금을 납입하는 도중에 사망할 수 있으므로 이런 경우 보호자 명의로 가입을 유도해야 한다는 업무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한데 선은 못내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짧은 상담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뿐인데 약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목을 뒤로 꺾어 스트레칭을 하려다가 칸막이 위로 두 눈을 뺀 채 직원들을 감시하는 김 팀장 시선과 마주쳤다. 열없이 고개를 내리려는데 김 팀장이 자신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인 것 같다. 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녀가 알 수 없는 고갯짓을 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선은 그것이 회의실로 오라는 의미라는 것을 30초 정도 후에 알아챘다.

     선이 조심스럽게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 팀장은 조회 때와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반겨주었다. 마주 앉은 김 팀장 뒤편에는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하얀 설산을 음영으로만 표현해 놓아서 얼핏 보면 수묵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유화였다. 액자 유리에 김 팀장의 뒷모습이 함초롬한 실루엣으로 비쳤다. 마치 설산에 드리운 구름 그림자 같았다. 실존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그림자에 선은 순간적으로 빨려들었다. 세상 모든 여자의 그림자는 한결같이 미오를 닮았다. 힘겹게 시동이 걸리는 고물 자동차 엔진처럼 선의 심장이 덜컹했다.
     "이 사무실에서 사람 같은 건 당신 하나뿐이야."

     뜬금없는 김 팀장 얘기에 선의 시선이 액자로부터 그녀의 얼굴로 옮겨간다. 김 팀장은 목소리를 낮추고는 문 옆에 세로로 길게 나 있는 반투명 유리창 쪽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수컷들은 미학적으로 너무 불완전한 존재야. 왜 아름다워지는 법을 모르는 거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 그저 본능에만 충실해."
    선은 뭐라 응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릴 때마다 작은 코 위에 걸쳐 있는 검은 뿔테 안경이 무기력한 부표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그냥 지켜보고 있을 뿐. 조금 전 액자에 비친 팀장님의 그림자는 아름다웠어요. 이렇게 말하는 대신 선은 '미학적'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어려운 인문 수업 중에 튀어나온 어휘처럼 감흥이 전혀 없다. 불쑥 김 팀장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자신의 치부라도 털어 놓으려는 사람처럼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무실에서 유일한 여자인 내게 소리 없는 항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못나고 더러운 족속들보다 자기처럼 가꿀 줄 아는 남자가 훨씬 마음에 들어. 단지 잡티만 조금 더 신경 쓰면 돼."
     선은 김 팀장 얘기를 들으며 다시 미오를 떠올렸다.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적이 없던 그녀는 이별에 대해서도 아무런 예고나 암시를 주지 않고 홀연히 떠났다. 퇴근해 돌아왔을 때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메모지에는 '그동안 고마웠어'라는 짧은 문장만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메모지 한 장과 침대에 남겨진 샴푸의 일랑일랑 향만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의 전부였다. 선은 그날 밤 침대보를 몇 번 쓰다듬다가 메모지에 적힌 글을 소리 내 읽는 행동을 날이 샐 때까지 반복했다.

     "자기 피부는 여자보다 고와. 맑고 투명해서 눈이 정화되는 것 같아."
     가끔 미오가 선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벅찬 행복을 느꼈다. 미오와 함께 살았던 1년 동안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현재가 걱정되고 궁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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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선은 급히 꺾여 올라간 김 팀장 목소리에 미오에 대한 상념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였다. 김 팀장은 손에 들고 들어왔던 빨간색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냈다.

     "남성용 쿠션 파운데이션이야. 내 거 사러 갔다가 자기 것도 하나 샀어."
     반짝이는 은회색 케이스로 된 동그랗고 납작한 콤팩트를 선에게 건네준 뒤 김 팀장은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선은 자리로 돌아와 콤팩트를 열어봤다. 미오가 화장할 때마다 작은 손거울이 달린 물건을 들고 열심히 찍어 바르던 게 생각났다. 뚜껑 안쪽에 앙증맞은 거울이 달려 있고, 살색보다 약간 어두워 보이는 색을 띤 촉촉하고 말랑해 보이는 스펀지 같은 것이 하얀색 원형 퍼프와 함께 들어 있었다.

     김 팀장에게 받은 콤팩트를 들고 화장실로 간 선은 퍼프에 파운데이션을 조금 묻혀 잡티 부위에 톡톡 두드려가며 발라봤다. 확실히 비비크림만 바른 것보다 거무튀튀한 자국이 좀 더 옅어 보이긴 했는데 제대로 펴 바르지 않으면 잘 뭉친다는 단점이 있었다. 뭉치지 않도록 퍼프로 반복해서 얼굴을 두드리고 있을 때, 동료 B가 불쑥 들어오다가 선을 발견하고는 주춤했다.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선은 얼른 콤팩트를 주머니에 넣고 황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자리에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B가 선의 책상 위에 퍼프를 올려놓고 갔다. 급하게 나오다가 흘렸던 모양이다. 순백색이던 동그란 퍼프는 파운데이션이 덕지덕지 묻어 그새 지저분해졌다. B의 얼굴을 올려다보기가 뜨악해서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선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상 위에 퍼프를 내려놓던 거칠고 투박한 손길만 기억났다.

     선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B가 A와 뭔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A와 시선이 마주치자 선은 얼른 고개를 책상 위로 파묻었다. 다시 콤팩트를 꺼내 뚜껑을 열고 거울을 보니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파운데이션이 군데군데 얼룩진 것처럼 묻어 있었다. 선은 일단 손으로 문대어 대충 정리를 하고 쫓기듯 콤팩트를 집어넣었다.
     "일 안하고 뭐해!"
     등 뒤로 김 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B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선이 막 상담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 김 팀장이 옆자리를 지나가며 메모지 한 장을 놓고 갔다.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같이 해. 파스타와 와인. 퇴근 후 후문에서 기다릴게.'
     '희망상조'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노란색 메모지에는 남자 직원들을 향해 거칠게 고함을 날려대는 그녀의 성깔이 깨끗하게 거세돼 있었다. 성향과 감정이 사라진 텍스트는 선에게 풀리지 않는 암호 같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고 걸려오는 상담 전화도 뜸해질 때까지 창밖에는 간단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선은 휴대폰을 들어 김 팀장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하다가 몇 번을 망설였다.

     휴대폰 연락처 검색 창에 '김'이라고 치자 같은 성으로 시작하는 이름 목록이 차례대로 떴다. 하필 맨 위에 '김미오'가 나타났다. 숱하게 불렀던 이름이건만 성 하나가 추가된 이름 석 자에서는 괴이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미오의 번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선은 떨리는 손으로 삭제 버튼을 누르려고 했지만 가위에 눌린 듯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퇴근 무렵이 되자 비가 그쳤다. 김 팀장은 후문 쪽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후문 쪽은 직원들 왕래가 많지 않아 보는 눈도 거의 없었다. 김 팀장은 다가오는 선을 향해 찡긋 웃어 보이고는 마침 골목 안쪽을 지나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김 팀장 몸에서는 옷장용 탈취제 냄새가 났다. 슬쩍 돌아보니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졸고 있었다. 선은 차창을 반 뼘쯤 내리고는 황소숨을 쉬듯 날아오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차창에 서린 빗방울이 무서리 같기도 하고 미오의 눈망울 같기도 했다.

     15분 정도 달린 택시 기사가 큰 소리로 근처에 다다랐음을 알리자 김 팀장은 졸음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더니 앞에 보이는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다. 두어 번 더 꺾어 들어간 골목 어귀에 아담한 높이로 올라가 있는 '로열 팰리스' 오피스텔이 나타났고 택시에서 내린 선은 김 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나 옷 좀 갈아입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김 팀장은 입고 있던 치마의 지퍼를 내렸다. 원룸 형태 오피스텔이라 선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뒤돌아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까지? 속옷을 벗는 것도 아닌데. 이제 됐어."
     김 팀장은 선의 뒤통수에 대고 앵무새 톤에 가까운, 생전 처음 듣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죄진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돌아보니 헐렁한 니트에 치렁치렁한 검은색 치마를 입은 김 팀장이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정장을 입고 있을 때와 집에서 니트를 입고 있을 때 김 팀장의 가슴 크기가 많이 달라 보여서 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만한 미오의 가슴은 옷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늘 변함이 없었고 그것은 선에게 왠지 모를 위안과 믿음을 주곤 했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
     김 팀장이 한 마디 건네고는 냉장고에서 꺼낸 식재료를 싱크대 위에 널브러뜨려 놓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선은 그녀의 애견이 된 듯 얌전히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미오와 함께 신혼살림을 차렸다면 적당했을 크기였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