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흔적- 김연동
의미 없이 꽂혀 있는 오래된 서책처럼
지나간 시간의 흔적 그 끈을 쥐고 앉아
휘어진 정강이뼈만
쓸고 또 쓸어 본다
증후성 신경통은 시비 걸듯 일어나고,
침묵도 짐 되는 듯 초침소리 높아가는
내 방안 가난한 이력
앞무릎이 시리다
☞ 인간의 목숨이 다하는 날은 욕망의 끈을 놓는 날이다. 너무도 ...2010-07-29 00:00:00
- 바람이 운다는 말- 서일옥
바람이 운다는 말 여기 와서 처음 알았네
창녕군 부곡면 한골부락 50번지
칠원댁 내 어머니가 여든 해나 살아온 집.
다 뜯긴 창호지 문
문살만 남은 안방
그 안방 못 잊어서
요양병원 몰래 나와
버선발 종종거리며
어둠 속을 달려온 집
모시인 양 하늘하늘 볼에 닿던 그 바람
이제는 울음이 되어 ...2010-07-22 00:00:00
- 어머니- 김영재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가 우신다
“니가 보고 싶다” 하시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더욱더
서러워하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릴 적 객지에서 어머니 보고 싶어 울었다.
그때는 어머니
독하게 울지 않으셨다
외롭고
고단한 날들 이겨내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고향도 객지로 변해
어머닌 객지에서
외로움에...2010-07-15 00:00:00
- 은유의 돌- 김춘랑
끝내는 무너지리다
그대의 성, 견고한
허언과 감언으로
식상한 들풀들이
눈부신
청기와 용마루를
눈 흘기고 있나니,
차라리 묵묵부답하는
돌이 되리라
온 세상 석공들이
날선 정으로 쪼아
정수리 으깨어지고
피 흘린다 할지라도
☞ ‘율’동인으로 향토문화를 선도하며 평생을 시조와 더불어 살아온 ...2010-07-08 00:00:00
- 그 여름의 명상- 유재영
섬진강 물소리가 평사리를 지날 때
소린 없고 빛만 남아 마른 들을 적시더라
은어도 하늘빛 닮아 반짝이는 이런 날
지리산 어린 바람 오던 길로 달아나고
비 개인 대숲으로 맑게 트인 산새 울음
초록빛 오, 저 사투리 화두처럼 듣는다
☞ 섬진강 푸른 물빛으로 그려놓은 그리움을 주조로 한 작품이다. 평소 유...2010-07-01 00:00:00
- 세속- 박기섭
씻어도 씻어도 끝내
오욕의 때는 남아
내 누린 환희도 희열도
그 죄다 사치였음을
창 너머 불현듯 부푸는
목련 보고 아느니
☞ 세속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세속은 오욕의 환유이고, 세속 위에 꽃잎 부푸는 목련은 순백의 상징이다. 어느 날 시인이 바라본 창 너머엔 환한 목련이...2010-06-24 00:00:00
- 매화 눈 뜨다- 박재두
매화 눈 뜨다 - 박재두
눈 못 뜰 진눈깨비 속 내맡긴 이 가슴팍
한 가닥 핏줄을 감고 손톱 밑까지 와서
부르튼 살을 헤집고 토닥토닥 불티가 난다.
고추 타는 연기 천한 눈물 짓이기어
기우고 꿰맨 누덕 그 거친 살갗에도
파랗게 불티가 난다. 한점 뼈끝을 깨고……
☞ 故 박재두 시인은 탁월한 언어 감각을 ...2010-06-17 00:00:00
- 중원, 시간여행- 윤금초
몸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서는 저 산빛
떡갈나무 잡목숲 흔들고 오는 문자왕 그의 호령
중원 고구려비 돌기둥 휘감아 도는데 들리는가, 산울림
우렁 우렁 일렁이는
찾찾찾찾자되찾자…… 기찻소리, 하늘의 소리
☞ 윤금초 시인의 사설이다. 사설시조는 조선중기 산문정신의 발아로 평민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2010-06-10 00:00:00
- 어느 날 문득- 김교한
어디에도 발 디딜 징검다리 보이지 않는
거울 속 들어 앉은 미완성 설경 한 폭
넘어 온 산이며 들판이며, 멀리 뻗는 지하수맥
☞ 늘 다니던 길을 걷다가 문득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거나, 직관으로 인해 삶의 새로운 변화를 맞기도 한다. 이 시조는 거울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있는...2010-06-03 00:00:00
- 벚꽃 길-사월을 생각하며- 이상범사랑이 지나는 길은
지상 어디고 꽃길이다
꽃 속에 꽃으로 나부끼며
꽃이고자 했던 그들
삼십 년 전에 이 꽃길로
꽃을 밟은 그는 없다.
천상의 꽃으로 떠난
그의 발자취 또한 꽃
사람이 주인인 꽃은
마침표가 없는 꽃
올해도 그 꽃길을 따라
아이들이 가고 있다.
☞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2010-05-27 00:00:00
- 아득한 성자(聖者)-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는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聖者)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조오현 스님의 ...2010-05-20 00:00:00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뇌어본다
어-머-니.
☞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골라 보았다. 박시교의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 이름 어머니! 어디 지상에서만 아...2010-05-13 00:00:00
- 노을- 이우걸
젖은 어깨 위에 하늘이 쌓여 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푸나무 잎사귀 같은
권세가 떠나고 있다.
☞ 간결한 진술과 적절한 비유로 형성된 이미지가 무겁다. 이 시조는 이미지가 중층이기 때문에 시적 울림의 진폭이 크다. 그러나 시조의 행간에 던져 놓은 이미지는 어렵지 않다.
독...2010-05-06 00:00:00
- 서울1- 서 벌내 오늘
서울에 와
만평(萬坪)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70년대 초, 시인 서벌은 고성 들판에 바지게를 세워둔 채 낯설고 물도 선 서울로 올라갔다. 상경한 그를 처음 맞아준 것은 적막이었다. 그것도 만...2010-04-30 00:00:00
- 근황(近況)- 김상옥성근 숲
여윈 가지 끝에
죽지 접는 새처럼
물에 뜬
젖빛 구름
물살에 밀린 가랑잎처럼
겨울 해
종종걸음도
창살에 지는 그림자처럼
☞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인의 형편을 함축적 이미지로 표현한 단수이다. 이 시조는 초정의 언어 조탁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작품 ...2010-04-22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