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과 매화- 송찬호 달 뜨는 초저녁활짝 핀 매화 아래 서니매화에 달을 그린그림쟁이의 마음을 조금 알겠네매화는 달이 얼마나 맑고 차운지가까이 불러 한번 어루만져보고 싶었을 테고달은 또 매화 곁으로 조금씩 옮겨 앉다가그 향기를지팡이 삼아꽃 한 가쟁이를 꺾어 가고 싶었을 테...2013-07-25 11:00:00
- 천원한장- 이한걸 천 원 한 장 키 낮은 처마 맞대고 이어진 동네 골목길을 형제가 걸어가고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에 걸린 열쇠 달랑달랑 흔들린다 학원에도 못 가고 물놀이도 못 가...2013-07-18 01:00:00
- 뒷굽- 허형만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돌고 도는...2013-07-11 01:00:00
- 혜자의 눈꽃*- 이월춘훌쩍 서른 해 저쪽말복과 입추 어름이었지 아마칠불사 계곡 대궐터 민박집 툇마루에 앉아세한(歲寒)의 마당을 거닐며 추사를 만나고 있었지드럼통 난로가 사람 온기 붉은 서정으로한촌의 적막과 그리움의 책갈피를 넘길 때노란 꽃술의 발자국 눈꽃이 피어났어혜자보다 혜자 엄마의 사연은 인지상정일까부뚜막에 앉아 부...2013-07-04 01:00:00
- 드문드문, 당신- 정유미대여기간 일주일, 시집을 빌린다몽글몽글 침이 고여오는 것이씹을수록 달라붙어연애시절 그는시집 속 빗물 같아서한 구절 한 단락이 뻐근하게 저려와아프게 묻곤 뜨겁게 끄덕였지그의 우산이 되려 헤어지지 않을, 주문을 했어손 안에 든머리맡에 놓인훔치거나 엿보지 않아도드문드문 읽히는 당신.- <경남문학> 201...2013-06-27 01:00:00
- 파열- 김명은들끓던 벨소리불과 몇 초 만에 차가워진다이어폰을 꽂은 남자의 구두코가 계단에서 꺾인다전화기를 귀에 대면 조련사의 갈고리에 찢기는 코끼리소리 들린다코끼리소리보다 컸던 여자의 귀가 바늘귀보다 작아진다목마른 코끼리가 긴 코로 침 뱉는 소리 들리고목덜미로 번져가던 이른 햇살이파랗게 얼어붙는다 그는 간곡...2013-06-20 01:00:00
- 살구나무와 젖소- 유희선축사 담장에살구나무 세 그루소젖 한 번 빨아보지 못하고살구는 익어가네일 년 내내 김 오르는 똥오줌 냄새로살구는 통통해지네녹슨 자물쇠 너머명례공소 종소리낙동강 물을 퍼 올려살구를 씻어주네젖소들이눈을 끔뻑일 때마다살구 떨어지는 소리침 흘리는비탈진 축사로굴러가는살빛 살구들 -<시인의 눈> 2012년. ...2013-06-13 01:00:00
- 흐린날의 명상- 황영숙 시인흐린 날의 명상오래 기다렸다는 듯이검은 장갑을 낀 우수가베란다의 창밖에기대어 있다아무래도 나는 오늘저 정체 모를 구름 속으로걸어가게 될 것 같다깊게 일렁이는 슬픔들이그윽한 풍경 속으로 젖어들고감출 수 없는 마음의 끝 하나잡지 못해온종일 목이 아프다짙은 수묵화처럼내려앉은 산기슭에구름은 느리게 지나...2013-05-30 01:00:00
- 패류의 무늬 - 정푸른 시인 패류의 무늬 내 얼굴은 물결의 방향을 본뜬 가면이다무늬의 가장자리에 기거하고 있는굴곡은 안으로만 유연한 음감을 지니고 있다시퍼런 물결을 한 겹씩 벗기면품기 좋은 살결을 가진 바다가 와락 들이친다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허기를 가지고 사는 건수많은...2013-05-23 01:00:00
- 기다란 팔- 문복주(시인)누가 나를 안을 때나는 기다란 팔을 생각한다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꼭 안고 캄캄한 세상을 건너내가 눈을 떴을 때놀라운 세상이 나타나는 기다란 팔과 날개를 가진 사람기다란 팔과 날개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다나는 지금도 잠자면서 기다란 팔을 가진 사람이나를 안고 어딘가로 날아가는숨쉬기도 힘들게 나를 껴안고...2013-05-16 01:00:00
- 산에 들어- 손국복(시인)바라다보면 품이 그립고품에 들면파헤치고 싶은끝없는 참선비 오는 날이면빗장을 걸고온몸으로 눈물 채워마침내 우우잿빛 그리움 왈칵골골이 쏟아내는슬픈 법어지나다 보면 거기 그대로다가서면태연한 몸짓으로한 걸음 물러서는기품의 산승. - ☞ 지천에 들꽃들이 자기 색깔을 뽐내고 있는 봄날입니다.꽃을 바라본다는 건...2013-05-09 01:00:00
- 소금기도 없이- 김남호(시인)식은땀은 무섭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처럼 무섭다 영혼이 빠져나갈 수 없는 몸뚱이처럼무섭다 선뜩하게 와 닿는 비수의 끝,조용히 내리긋는다 겨드랑이에서 옆구리로 소금기도 없이- ☞ 봄이 무섭다. 식욕이 떨어지고 만성피로감에 젖은 ‘몸뚱이’는 늘 피곤하다.현대인들은 복잡한 인간관계, 빠른 변화 속에서 자신만...2013-05-02 01:00:00
- 괴사(壞死)- 김륭(시인)팔월의 소낙비처럼, 그대 다녀간 후였죠. 열 개의 손가락 가운데 다섯 개가 저만치 고물자동차 와이퍼로 변하더군요. 나를 지나간 모든 이들의 행운을 빌고 싶었지만 거울은 버럭 화부터 냅니다. 코가 돌부리처럼 쑥쑥 자라는, 그런 날의 얼굴이란 수음도 할 줄 모르는 노처녀의 손에 들려있는 책 같아요. 꿈틀 발밑의 ...2013-04-25 01:00:00
- 슬픔에게 1- 이상옥(시인)슬픔에게 1곁을 떠난 적도 있는 줄 알았는데몸을 바꾸고 얼굴을 바꿨을 뿐너는 섬을 감싸고 도는 파도처럼 낯을 때렸고나는 늘 젖었었다그래도폐허처럼 평화롭다-시집 2007. 한국문학도서관☞ 슬픔은 생의 양식이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우리 생의 곳곳에 묻혀있는 시간들의 많은 부분들은 슬픔과 연결되어 있...2013-04-18 01:00:00
- 의자 위의 흰눈- 유홍준(시인)간밤에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가장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창문에 매달려 한나절,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에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햇살이 퍼지자멀고 먼...2013-04-11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