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붉은
사랑, 붉은
- 정일근
은현리 들길 걸어가다
가을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보았습니다
또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
그 주검 곁을 지키며
오래 날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미물들도 저리 붉게
사랑했나 봅니다
제 몸과 색깔 다 벗고
모두 돌아가는 이 늦가을까지
-동인지 제3호...2008-12-30 00:00:00
- 신방(新房)
- 유재영
한 마리는 무릇꽃에서 날아왔고 다른 한 마리는 청미래 덩굴이 고향이다 오배자 동쪽 가지에서 첫날밤을 보낸 무당벌레 신혼부부, 아, 이 산중에도 나뭇잎 셋방 하나 더 늘어나겠구나
- ‘내일을 여는 작가’ 2008 겨울호
☞ 겨울, 숲을 생각한다. 나뭇잎마다 세 낸 방에서, 아주 편한 잠에 들...2008-12-26 00:00:00
- 고요한 연못
고요한 연못 - 조정권
물 위를 헤엄친 눈송이,
그 寒生.
그 분은 침묵이었네, 한 번도 발설되지 않은 침묵.
-계간『현대한국시』, 2008 여름 창간호에서
☞ 머리로는 도저히 해독되지 않는 시, ‘고요한 연못’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한 순간, 어떤 심연 속으로 아득히 빠...2008-12-23 00:00:00
- 미국을 생각하며 - 박구경
뜨거워지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파고드는 미꾸리
눈 깜짝할 사이에
무역센터로 들어간 한 세기 초유의 증오이고 싶다
한 사람이 또 떠나가는 의료원 앞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바글바글,
지난 세기를 모두 뚝배기에 섞어 넣고
밤새도록 온 우주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띄워 보내는
텔레비전
한...2008-12-19 00:00:00
- 홍시
홍시
- 이 안
어머니가 갓난 내 불알 두 쪽
바라보신다
아무도 물어가지 못하게
가장 쓰고 떫은 것으로
채우셨으나
아,
지금 내 몸이 너무 달다
-시집 ‘치워라, 꽃!’에서
☞ 이쯤 되면, ‘동화’냐 ‘투사’냐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무의미하다. 완벽한 물아일체의 상태, 바로 여기서 시는 탄...2008-12-16 00:00:00
- 내 마음의 지도
-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2008-12-03 00:00:00
- 황야의 이리 2
- 이건청
탱자나무가 새들을 길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 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들을 몰고 가는 바람...2008-11-25 00:00:00
- 너는 꽃이다
- 이도윤
나는 오늘 아침
울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눈부시어
울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아파트 10층 시멘트벽 물통 사이
조막손을 비틀고 붉게
온몸을 물들인 채송화 하나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눈물인 듯 매달려 피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햇살 하나
그를 껴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 생...2008-11-14 00:00:00
- 화려한 유적
- 이윤학
무당벌레 한 마리 지금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 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 누구나 스스로의 삶...2008-11-07 00:00:00
- 가을엽서
- 강연호
훤칠하게 마른 빗줄기가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바람 몇 다발 달려가다 넘어져
일제히 다시 구두끈을 조일 때
건널목 무단횡단하던 낙엽들
후이후이 휘파람 불었습니다
한 여자가 보도블록 위에
또박또박 화장을 찍으며 지나가고
동전만 삼킨 자판기를
나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빈 호주머니 속...2008-11-04 00:00:00
- 물소리 솔바람소리
- 고재종
저 시린 가을물소리
어느 땡초의 목탁소리보단 가을물소리
산 아래 백리까지 끝까지
일거에 화안히 트이는 가을물소리
바람도, 바람도 드맑게 울려나서는
계곡에 들국 마구 터뜨릴 때 가을물소리
내 어느 날 지친 꿈 세상에 던져주고
저기 저만큼 억새꽃 하나로나 흔들릴 때
내 어디...2008-10-30 00:00:00
- 생각하는 자유가 - 박이도
가을엔 돌아가고 싶다
그림자 따라 빈 들에 나서면
사라지는 모두와 결별의 말을
나누고 싶어
기러기처럼
아득히 사라지는 세월, 세월을 향해
아쉬움을 울고 싶다
허연 낙엽은 지고
마른 풀잎은 가볍게 날리는
여기에선 모두가 부산하다
호올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 허수아비처럼
한참을 서...2008-10-29 00:00:00
- 못 - 최석균
내가 사는 집은
못의 힘으로 서있다
못은
둘을
하나의 상처로 묶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으스러져라 안고
소리를 삼킨다
못은 뒹구는 존재를 세우고
각진 세상을 잇는다.
☞ 우리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 경험은 일상성을 넘어설수록 교육적이며 오래 남아 ...2008-10-28 00:00:00
- 음악 -망가진 삶을 위하여
- 이경임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른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2008-10-27 00:00:00
- 1886년 미국 뉴욕서 ‘자유의 여신상’ 제막
역사 속의 이번 주 (10월 27일~11월 2일)
▲박 대통령 사망 비상계엄령 선포 (1979년 10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밤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전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정부는 대통령 궐위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2008-10-27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