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뼈가 떴다- 이주언
꽃 지고
잎 다 진, 겨울 도읍지에서
나무의 뼈들을 바라본다
골골 ― 보일러 돌지 않는 집처럼
얇은 햇살 귀퉁이에 어깨를 뉘고 걱정마라 내사 괘얀타마
삭정이 같은 두 발로 아랫목 더듬는 사람들
생을 지탱시킨 힘
제 살 다 내어준 뒤에야 드러난다
(중략)
오리무중의 늑골 사이를 유영해도
지상에 ...2010-11-25 00:00:00
- 얼굴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2010-11-18 00:00:00
- 사람을 쬐다-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2010-11-11 00:00:00
- 살구꽃- 송찬호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양산을 활짝 폈다가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 날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비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나무라는 걸 훤히 알듯이
재봉...2010-11-04 00:00:00
- 지구의 눈물- 배한봉
둥근 것들은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어제는 혀에 닿는 과육 맛에만 취해수밀도를 먹으면서 몰랐지사과 배 포도알까지 둥근 몸은 모두달고 깊은 눈물왕국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눈물왕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맛 없을 때마다 그 왕국에 간다
...2010-10-28 00:00:00
- 이웃-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2010-10-21 00:00:00
- 낮달- 김일태
깍짓손 팔베개에
가을이 아늑하다
밀물로 깊어진
하늘바다
벗어 가난한 힘으로 떠서
평형으로 헤엄쳐 건너가는 저
하늘새
가벼운 날갯짓에
물결 하나 일지 않고
구름섬 몇 떠서 보금자리 차려내어도
단호히 비켜 가는
흰 기러기 한 마리
-김일태, ‘낮달’ 전문(시집 ‘바코드속 종이달’, 시학 2009)...2010-10-14 00:00:00
- 꽃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2010-10-07 00:00:00
- 수련(睡蓮)- 이월춘
수련은 민무늬의 추억을 갖고 있다
그 추억의 쇄골에 어깨를 기대고
햇빛이 가장 순수하고 뜨거울 때
가벼운 번민 하나 없이
단 사흘을 피고 지고 피고 지다가
영원히 물로 돌아가 침묵 속에 잠기는 수련
찰나의 문을 지나 영원으로 들어가는 몰입의 의미여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말이 이루어지고 스스로 깊어가...2010-09-30 00:00:00
-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2010-09-16 00:00:00
- 생애전환기- 박서영
의료보험 공단에서
생애전환기의 건강검진통보를 보내왔다
환승역에 닿아서 겨우 종이 한 장 받은 기분이다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어디로 갈아타야 할지 모르는데
발부터 머리꼭대기까지 잔뜩 긴장해서
통보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무서운 병명들이 빼꼭히 적혀있다
위꽃, 유방꽃, 자궁경부꽃...2010-09-09 00:00:00
- 자연론- 정일근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이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이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자연론’ 전문
(시집 ‘기다린다는 것...2010-09-02 00:00:00
- 갈매기살- 김혜연
나도 날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뭐니
살찐 가슴에는 출렁출렁 파도가 일고
네 다리를 가볍게 펄럭거리며 새처럼 날고 싶었지 뭐니
의지와 상관없이 펑펑 터져오르는 신나는 이 기억을
하필이면 다짜고짜 내 늑골 한 켠에 부적처럼
가장 먼 곳의 이름으로 달아 주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 뭐니
(중략)
욕심 많은...2010-08-26 00:00:00
- 개심사 종각 앞에서- 최영철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2010-08-19 00:00:00
- 별- 성선경
아차 순간 내 헛디딘 잘못 하나로
그만 정한수 사발이 깨어져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깨어진 사금파리들이
저 하늘에 가득 찼습니다.
나는 얼마나 잘못하며 살아왔을까요?
이젠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 삶의 편린과 상처를 긁어모아 시화하는 일에 온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마음의 그릇이 ...2010-08-12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