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강(曲江)- 김시탁강물은 모래 속에 발목을 묻고미리 줄기를 늦추어 흐르고암벽은 맨몸으로 부딪쳐 올 강물을 상처 없이 받기 위해아랫배에 힘을 준 채 시린 관절을 접지 않는다수심이 깊은 곳엔 그리움도 깊어머물고 싶은 마음과 보내기 싫은 마음 사이로길이 생긴다강물이 굽어 흐르...2011-03-10 10:02:20
- 잔춘(殘春)- 박구경밤새 내린 비는 이랑에 따스하게 스몄는가보다마주치는 곳마다 햇살 잘바닥거리더라니나라도 눈부시다어디서 들려오는 살육의 소식을 무시하고도밭둑마다 작은 기운의 풀들이 생업으로 근질거린다터지려는 꽃,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살아야 할 대부분이다-박구경 ‘잔춘(殘春)’ 전문(시집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2...2011-03-03 09:52:36
- 정당매(政堂梅) -남명(南冥)을 찾아 - 공영해
볕뉘조차 못 쬔 그 분
단속사(斷俗寺) 들르던 날
부처도 떠난 절간
그 지키던
매화
만났네
올곧은 정신의 뼈대
시간 위에
얽고 있는
-공영해 ‘정당매’ 전문(시집 ‘낮은 기침’, 2007)
* 정당매(政堂梅) :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지 안에 있는 매화나무
☞ 입춘 우수가 지났으니 맹위를 떨치던 ...2011-02-24 00:00:00
- 이선관- 박노정
이제 더는 볼 수 없지만
시인 이선관
설레이던 문패의 추억은
오래도록 눈앞에 어른거려
더러는 가슴에 새기고
나머지는 얼쑤 추임새로
다시 풍성한 이미지로 기지개를 켜나니
어눌한 말솜씨로
갈지자걸음으로
젖 먹던 힘으로
눈 내려 새하얀 첫길에
창동백작 나가신다
물러섰거라
-박노정 ‘이선관’ 전...2011-02-17 00:00:00
- 흑백다방- 정일근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2011-02-10 00:00:00
- 봄- 이우걸
수피(樹皮) 속엔 어둠을 쫓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그것들이 상처에 닿으면
죽창 같은 잎을 내민다
어혈진 가슴을 푸는
이 화해의 영토 위에서
-이우걸, ‘봄’ 전문(‘맹인’, 2003)
☞ 한겨울일수록 ‘봄’의 가치는 더욱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이 땅의 나목(裸木)에 귀를 대보세요. 지금은 비록 어...2011-01-27 00:00:00
- 월영대(月影臺)- 이광석고운이 바다를 버리고
해인사로 가던 날
올무에 같힌 달빛이
한없이 울었다
돝섬이 닻을 올리고
월영대가 셔터를 내렸다
누구 하나 만류하는 사람 없었고
따라나서는 기척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가야산에서
이승과의 소통을 끊었다
그러나 고운은 다시 돌아왔다
월영대에 거룩한 시의 ...2011-01-20 00:00:00
- 바위, 相思- 송창우
맑은 날엔
노루목 너머 총각바위
거제도 장목 바라봅니다
그러면 장목 처녀들 바람이 나서
하나, 둘 보따리를 싸고
상심한 장목 마을 사람들
총각바위 수장하고 돌아간 날 밤
물 밑에서 처녀바위 하나
불쑥 솟았답니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처녀바위 동백꽃이 피면
푸른 숭어 떼가 몰려와 다리를 놓고
...2011-01-13 00:00:00
- 커피포트- 김종영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비등점의 포말들
음이탈 모르는 척 파열음 쏟아낸다
적막을 들었다 놓았다
하오가 일렁인다
선잠을 걷어내어 베란다에 내다건다
구절초 활짝 핀 손때 묻은 찻잔 곁에
식었던 무딘 내 서정
여치처럼 머리 든다
설핏한 햇살마저 다시 올려 끓이면
단풍물 젖고 있는 시린 이마 위에...2011-01-06 00:00:00
- 동그라미-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2010-12-30 00:00:00
- 폭설의 저녁- 박은주
아파트 후문 트럭가게로
꿀빵 달라며 사내아이가 뛰어든다
호떡을 굽던 여자가
눈과 입꼬리로 대답을 건네는
묵음의 단내 환한 저녁 모퉁이에
자전거 한 대, 꼬꾸라진 채로 바퀴를 굴리고 있다
가방은 가방대로
철제바구니는 그것대로 나동그라진 저만치
여자가 탱탱한 악다구니를 뭉쳐
소년의 귓바퀴에 쑤...2010-12-23 00:00:00
- 둥글어지기 전- 강현덕
둥글어지기 전
말한 적 있었던가
나는 무기고였단 거
너를 향한 창들이
내게 가득했단 거
뒤집힌 허파 한쪽엔
비수도 꽂혔었단 거
네 말을 토막 낼 혀
밤마다 갈았다는 거
자물통 채워놓고
퍼렇게 갈았다는 거
내 몸이 둥글어지기 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강현덕, ‘둥글어지기 전’ 전문(‘서...2010-12-16 00:00:00
- 낙엽의 詩- 임성구
석류알 같은 한 줌 빛 와르르 쏟는 시월 오후
붉은 발자국 찍는 노란구두 한 켤레가
바스락
땅 위에 시를 쓴다
태곳적 붓을 들고
폭풍이 몰아치는 얼음의 강을 지나
벌나비 춤추던 알싸한 초원도 지나
매미가 목청을 돋우던 통증 멀리 사라진 언덕
은행나무가 줄지어 레일을 만드는 동안
불면의 밤은 또 ...2010-12-09 00:00:00
- 시간의 그늘- 성윤석
보내지 않을 수 있는데도 보내준다.
내버려두면 더 좋았을 법 싶은데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본다. 추운데도
창문을 열고 비를 들인다. 어두운데도
불을 켜지 않고
물지 않는데도 나방을 덮쳐버린다.
그리고 고요…… 내가 만든 오랜 고요
나는 늙는다.
날이 갈수록 사랑은
더욱 무서운 것이라서,
내 눈 끔...2010-12-02 00:00:00
- 뼈가 떴다- 이주언
꽃 지고
잎 다 진, 겨울 도읍지에서
나무의 뼈들을 바라본다
골골 ― 보일러 돌지 않는 집처럼
얇은 햇살 귀퉁이에 어깨를 뉘고 걱정마라 내사 괘얀타마
삭정이 같은 두 발로 아랫목 더듬는 사람들
생을 지탱시킨 힘
제 살 다 내어준 뒤에야 드러난다
(중략)
오리무중의 늑골 사이를 유영해도
지상에 ...2010-11-25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