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 김혜연해인사 계곡물소리 음각이다 솔바람 맑은 절간 앞마당 삼층석탑 석등 그림자 음각이다 저녁 법고소리 예불소리 저무는 가야산 붉은 어깨 음각이다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처마밑 풍경 음각이다 팔만대장경판 그 속에 숨어 있는 고려의 달빛도 음각이다 명부전 조사전 돌아 어진 사람들 가슴 지키는 누군가...2013-11-28 11:00:00
- 1시간 30분- 김명희바싹 마른 비명의 돌기가 솟구쳤다탄식과 울음의 불바다화부는 단내 나는 화덕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쇳소리 여운 뒤엔 긴 묵음이다체념의 눈빛들이 전광판 모서리로 달려갔다아무리 외진 몸이라도벗어 놓고 지나갈 수 없는1시간 30분, 저 절대의 시간 앞에서스스로 무릎을 꿇고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끙끙대는 동안눈동...2013-11-21 11:00:00
- 마라도- 김시탁사랑에 마음을 다쳐 상처 난 마음을 버릴 곳 없는 자는 마라도로 가라 모슬포항에서 뱃길로 30리쯤 더 남으로 들어가면 상처받은 사람들을 업어줄 움츠린 등 넓은 섬 하나 있다 그 섬에 뱃머리가 닿으면 제일 먼저 바람이 검문을 한다 신분증 대신 시커멓게 탄 가슴을 보여주고 바람이 등 떠미는 곳으로 올라가라 올라...2013-11-14 11:00:00
- 뇌사에 대한 문학적 고찰- 최영철 뇌사에 대한 문학적 고찰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소프트웨어의 크기는손가락 마디 하나인간을 조종하는 뇌의 크기도쏟아놓으면 한 접시배후조종은 정체를 숨기느라 크기가 작다지시하고 분노하고 쾌락을 거두어가는 뇌몸은 한 주먹 뇌의 노예흡연 음주 마약 섹스이 모...2013-11-07 11:00:00
- 환한, 내 것인 네 것- 이하석사진을 찍어달란다. 사진기를 받아 조그만 창으로 내다보니 그들은 서로 환하게, 다시 붙는다. 서로 참는 모습이 아니다. 함께, 웃음의 맞불을 지핀다. 그녀의 부푼 가슴을 그의 팔꿈치가 지그시 짓이기는 게 보인다. 그런 걸 눌러 찍는다. 날 믿지 못하겠는지, 다시 확실하게 서로 間을 붙들어두려는지 한 번만 더 찍어...2013-10-31 11:00:00
- 낙엽의 시- 임성구석류알 같은 한 줌 빛 와르르 쏟는 시월 오후붉은 발자국 찍는 노란 구두 한 켤레가바스락땅 위에 시를 쓴다태곳적 붓을 들고폭풍이 몰아치는 얼음의 강을 지나벌 나비 춤추던 알싸한 초원도 지나매미가 목청을 돋우던 통증 멀리 사라진 언덕은행나무가 줄지어 레일을 만드는 동안불면의 밤은 또, 얼마나 깊고 깊었던가...2013-10-24 11:00:00
- 연어- 정호승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사람의 손에게 이렇게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거친 폭포를 뛰어넘어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2013-10-17 11:00:00
- 섬진강- 김승강섬 진 강아버지 술 취하시면이 세상이 천국입니다.아버지술 깨시면이 세상은 지옥입니다.먼 도시의 불빛처럼세상은 천국과 지옥으로 깜박입니다.형광등은 수없이 명멸하면서빛나는 거라지요.천국과 지옥의 나무 사이에강이 있습니다.천국과 지옥이 명멸하는 빠르기로 쫓아가면나루와 나루 사이강이 한 줄기맑은 소줏빛으...2013-10-10 11:00:00
- 바바마마-옹알이 시간 - 박서영첫 마디 울음.그것은 가슴에 고여 왜 사라지지 않나.똥으로도, 오줌으로도 흘러나오지 않나.맨 처음의 발음이었던 울음.나의 언어와 표현은 발달하고상처와 고통은 안으로 깊이 가라앉고가끔은 비명도 질렀는데왜 아직도 옹알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입 안에서 빙글빙글 천둥을 녹여먹고, 연애를 녹여먹고 있나.잠자...2013-09-26 11:00:00
- [시가있는 간이역] 꾀꼬리 달- 이은봉그래요 달은 깃털 샛노란 꾀꼬리지요부리조차 샛노랗지요 달은어두운 밤하늘 환하게 쪼아대다가그만 지쳤나 봐요우리 집 베란다에까지 날아와플라스틱 창들을 쪼아대고 있네요샛노란 깃털을 뽑아주방 안에 자리를 펴는 것을 보면달은 배가 고픈가 봐요으음, 꾀꼴대는 소리가꼬록대는 소리로 들리네요베란다에서 저절로 ...2013-09-12 11:00:00
- 맹인- 이우걸맹인은 사물을 손으로 읽는다손은 그가 지닌 세계의 창이다마음이 길을 잃으면쓸쓸한 오독(誤讀)도 있는…눈 뜬 우리는또 얼마나 맹인인가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한 세상을빈 하늘 뜬구름인양하염없이 바라본다.- 시선집 <어쩌면 이것들은> 중에서☞ 손으로 세상을 읽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팡이를 거쳐서 손...2013-09-05 11:00:00
- 안부- 최승자 안부- 최승자나더러, 안녕하냐고요?그러엄, 안녕하죠.내 하루의 밥상은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한마디로 진수성찬이 되고요,내 한 해의 의상은당신이 보내주는 한 번의 미소로 충분하고요,전 지금 부엌에서 당근을 씻고 있거든요.세계의 모든 당근들에 대해시를 쓸까 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우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 ...2013-08-29 11:00:00
- 처서- 성선경나도 이제한창때는 지났나 봅니다.내 영혼 어디선가설렁설렁 바람이 불고내 무릎 아래에서알기는 칠월의 귀뚜라미라고말끝마다 사랑 사랑 합니다.나는 이제 막 고개 위를 올라섰는데속으로 굽어져 이제 찬바람이 이네요.누가 이런 변화를 알고 이름 지었을까요.불혹(不惑),나는 그쯤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시...2013-08-22 11:00:00
- 카레- 고영조밥 대신카레를 끓인다아내가 없는 동안양파와 감자당근과 마늘의뿔난 몸을 섞는다섞여서제 모습을 아주 버릴 때까지채찍으로 후려치거나섞이지 않는 몸들은더 작게토막 토막 자른다당근의 맛도 양파의 맛도죽인다쓰도 달도 않은저 묵묵부답다만 점액질의 순종얼굴 없는 혼돈의 맛을 끓인다- 시집 <감자를 굽고 싶다&...2013-08-08 11:00:00
- 생가1- 복효근 생가1옛날에 임신한 노루를 잡아먹은 두 친구가같은 무렵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두 아이 모두 벙어리가 되더란다별 아래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환갑을 넘긴 그 아이들 아직도 한 동네 살고 있어축생과 인간세를 잇는전생과 후생을 잇는보이진 않지만 있기는 있는질기고 질긴 연기의 끈이 만져지는 이야기교룡산과 풍...2013-08-01 1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