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곳-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참 좋지요중심이 비어서새들이/ 꽉 찬 /저곳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말뼛속이 비어서하늘 끝까지날아가는 새떼☞ 철새들이 돌아오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문득 물러서면서 허공에 자리를 내어주면 그렇게 넓어진 공간만큼이 새들의 차지가 되겠...2014-10-30 11:00:00
- 임방울- 송찬호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2014-10-23 11:00:00
-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2014-10-16 11:00:00
-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밤새 언덕에 서서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그 까닭만은 아니다언덕에 서서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그리운 쪽으로 돌아서고 있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2014-10-02 11:00:00
- 노을, 기차를 타다- 이일림 노을이 산꼭대기를 감싸 안고 있다 아직도 눈부시다아무도 부르지 않는 저 꼭대기에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날아가는 황조 한 마리 느낌이 때로 일생일 때가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밥을 안친다 쉬릭 쉬릭, 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한다 가을을 무르익히고 나온 당찬 쌀알들 그리움이 많은 것처럼 서로 모여 할 말도 많...2014-09-25 11:00:00
- 벚꽃- 이영탁 바람의 살결이던 나뭇잎 모두 지고앙큼하게 드러낸 뼈의 무늬 어찌하리 눈빛도 숨 막혀 황홀한 바람의 뼈 꽃 되다누군들 사랑 한 번, 이별 한 번 없었으랴편지에 아름답다 써놓고 돌아서면첫사랑 애절했던 시간도 흠뻑 젖는 덧붙임☞ 웬 벚꽃이야 그녀는 왜 아직도 지나간 계절 타령이야. 바람에 살결을 드러낸 채 떠나...2014-09-18 11:00:00
- 동거- 성명남 담장 안의 호박 줄기가 목을 길게 빼고생면부지의 감나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혼자서는 곧게 설 수 없는 줄기의 생이손 잡아줄 누군가를 향하여 먼저 다가선 것이다늙은 감나무를 위해 덩굴손의 방향을 바꿔 놓고 노끈으로 잘 묶어 두었지만이미 뜨거워진 감나무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본 뒤였는지하룻밤 사이 다시 몸을...2014-09-11 11:00:00
- 사과- 정푸른 속살을 아는 이여이가 닿은 곳을 시간이라고 하자갈변하는 인연의 색깔에 이유를 달지 말자거기는 눈물이 닿지 않는 곳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그믐이다베어 문 자리에서 돋아난 기억은물병자리 여인의 시큼한 암내 같은 것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기어 나오는,저녁으로 건너가는사람아정체를 들키지 말고 사라지자아직 덜 ...2014-09-04 11:00:00
- 남편의 구두- 문옥영 건강하던 남편이 입원했습니다금식 사흘 만에 남편은내게 자유를 주지 말고 밥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출근할 수 없는 남편을 인정할 수 없는 나는퇴근길의 발소리만 기억했습니다깜빡 졸면서도 문 밖으로 피가 쏠렸습니다남편을 더듬던 버릇은 벼랑으로 구르고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말 캄캄한 현관문을 바라보는데누군...2014-08-28 11:00:00
- 편의점에서- 문희숙 몽마르뜨 어귀에서 24시를 파는 그녀그들은 유리문 밀고 일상을 골라 사지만그녀는 그들에게서 하루치 쇠락을 번다몇 개의 낱말들이 간판을 수식한다말씀을 터놓자면무어든 파는 집이죠마모된 그녀가 진열되는 지폐의 물레방앗간 그들이 한 그루의 등불을 사갈 때마다그녀의 필라멘트도 환하게 낡아간다동백꽃 꽃등 하...2014-08-21 11:00:00
- 홀씨의 꿈- 유정자 혼자 여행하는 꿈을 꾼다나는 초원의 나무이고 싶고우듬지 위 자유로운 새이고 싶다또 누군가에게 마지막 잎사귀고 싶다연잎에 또르르 맺힌 한 방울 이슬이며그 이슬에 담긴 우주이고 싶다홀씨가 홀로 습지를 날아오를 때호수에 비친 것은 내 얼굴일거다내가 내 별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림자...2014-08-14 11:00:00
- 우울한 케이크 가게- 이은주
흐린 날
흐린 우산을 쓰고
흐린 케이크 가게를 찾는다
온통 흐린 크림으로
온통 흐린 꽃으로
무지 흐린 향으로 맛을 낸
우울 케이크를 혀로 핥아먹는다
<우>가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울>이 조심조심 스며든다
우울이 우물우물해진다
말랑해진 우울과 팔짱을 낀다
우울의 겨드...2014-08-07 11:00:00
- 외감리- 강현덕 외감리 낮은 돌담에 감꽃이 떨어집니다초여름 하얀 얼굴이떫은 허기로 주저앉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별 하나가 떨어집니다 ☞ 잘 지냈지, 소식 나누고 난 후 입꼬리 활짝 올리며 웃는 모습, 조근조근한 말씨, 챙 넓은 모자, 소녀처럼 자전거 타는 모습,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사랑스러웠던 그녀 모습이 오래된 ...2014-07-24 11:00:00
- 얼룩- 김경 누군가를 미워해 본 사람은 안다미움이란 얼마나 가누기 힘든 맨몸의 부대낌인가를미움이 내안의 가시로 돋을 때혼자 된 나는 밤의 강물처럼 적막하다목숨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얼룩을 가진다어디에 밀어버릴 수도 없어끌고 다녀야하는 저온의 상처세상을 뒤집어 살아본 사람은 안다누군가 버리고 간 꿈에도등 기대 꿈...2014-07-17 11:00:00
- 우물- 장예은 수압에 갇힌 파문은 환각의 골이 깊다.뚫어지라 바라보던 저문 물의 눈빛에손가락 깨물며 젖던 무명고쟁이 꽃무늬들.흩어지는 밤꽃 향내 손톱에 움켜쥐고기억의 골목길을 서성이는 항아리마다 한가득 출렁거리며 물 퍼 올리는 두레박.혈색에 쫓겨나고 기세에 밀려나고 시간에 감염되고 계절에 중독되어 약봉지 양손에 ...2014-07-10 11:00:00